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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진안가막리들 전주 - 정재립의 평생과 사상

by journal-discover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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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가막리들 전주

정 여립, 정 여립, 는 조선시대를 통일해 최고의 역적이다. 또 정여립 사건은 조선역사상 500년 첫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재립의 거사계획이 당시로서는 역모라고 불렸지만, 지금 바로 보면 분명히 혁명기도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재립은 천하공물설, 천하의 공물이지만, 어떻게 일정한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무슨 비군론, 누구를 섬긴 임금이 아닌가를 주장했다. 정재립은 혁명적인 급진주의자에 속한다.

 

정세립에 관한 기록은 거의 소실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 많다. 대략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1585년에 진정한 뒤 진안 다케시마에 거점을 두었다. 정재립의 호는 다케시마에서 다케시마에서 대동계를 조직, 왜구를 격퇴하고 다케시마에서 자결했다. 다케시마는 현재 진안군 진안읍 카마크리에 있는 섬과 같은 산입니다.

 

저자 맹목 배동수, 박사학위 논문을 2000년 책에서 출판한 정여립 연구를 일부 수정해 편집해 다시 전개했다.

 

정치립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조선의 상황은 지도층의 분열은 물론 국왕의 무능, 부정부패, 자연재해, 전쟁 리스크 등 국가 전반에 걸친 총체적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아마 혁명이 발생하는 분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정재립은 대명률 모반대역죄로 이미 죽은 몸이 다시 능욕처참됐다. 부모와 자녀는 모두 죽이고 살았던 집은 파서 연못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정재립의 아내와 노비는 공신의 소유가 되었고, 가산은 몰수되어 일가의 모든 것도 노비가 되거나 귀양을 보냈다. 정여립 사건은 신라와 백제간의 감정, 왕건의 훈요식초, 정감련, 태클리지 등과 함께 호남인기피 현상을 낳았다. 후난은 곡창지대이지만 그 때문에 수탈이 가장 심했다. 호남 민중의 원은 현세에서 풀리지 않고 마침내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주반경 100km 이내에서 갑오농민혁명, 한말 신흥종교(모악산을 중심으로 증산교, 원불교 등)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의 고뇌가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기축가는 조선조 광주사태였다. 약 3년간 정여립과 관여한 1,000여명의 동인이 희생됐다. 기축가는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이이가 죽은 뒤 정권에서 밀려난 소인 세력이 동인 세력을 타도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당시 소인 측 정철, 성홍, 성익필의 합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조상실록은 정여립 사건으로 수정편찬됐다. 조상실록에는 정여립 사건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단순히 기록하면서도 정철 등에 의해 무고한 인사가 희생됐다는 내용을 부각하고 있는 반면, 조상수정 실록에는 이이, 성혼, 정철, 조혼 등을 앞두고 이들의 항소를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조상실록은 동인들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라면 선조수정실록은 서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조선을 집권한 서인세력에 의해 과장돼 미화된 면이 많다.

 

정치립 사건 실패 이후 한국 정치사는 주자학적 이념만을 더욱 강화하는 보수반동적인 세력만이 융성돼 정치발전이 지체됐다. 정재립은 공화파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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